못잊을 추억은 세월의 언덕을 넘어
중구역 대동문동 57인민반 김지량로인의 가족이 들려준 이야기
뜻깊은 공화국창건기념일을 눈앞에 둔 이 시각 우리 조국의 국기, 국장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과 존중의 감정은 더욱 승화되고있다.
며칠전 우리는 중구역 대동문동 57인민반에 살고있는 김지량로인의 집을 찾았다.그의 아버지 김주경동지가 우리 공화국의 국기, 국장도안가들중의 한사람이였다는 사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하게 했던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우리 인민의 진정한 어머니품이며 참된 삶과 행복의 요람입니다.》
우리들이 찾아온 취지를 알게 된 팔순의 김지량로인은 수십년세월 소중히 안고 사는 추억깊은 이야기를 꺼내는것이였다.
주체36(1947)년 11월중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는 사업을 발기하시고 그 제정위원회를 내오도록 하시였다.
김주경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이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국장과 국기의 도안을 작성하는 사업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리 나라 국기와 국장은 완전히 새롭고 조선적인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그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켰다.하여 그는 도안가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실천에 구현하기 위해 피타는 정열을 쏟아부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국기초안작성사업을 일정하게 추진시켰을 때였다.
국기도안가들은 국기의 흰 동그라미안에 무엇을 그려넣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바로 이러한 때 당과 국가의 요직에 잠입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흰 동그라미안에 보습을 그려넣자고, 그래야 《조선적》이라고 고집하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흰 동그라미안에는 오각별을 그려넣을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소중한 별을 국기도안에 새기는 김주경동지의 눈굽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흰 동그라미안에 오각별을 정성껏 그려넣으니 기발이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았다.
그것을 깊은 감동속에 바라보는 김주경동지의 눈앞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따라 힘차게 전진하는 조국의 모습이 어리여왔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우리들에게 공화국의 국기, 국장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로고와 심혈속에 태여난것이라고 늘 외우군 했습니다.》
로인의 맏아들 김일기동무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할아버지가 국장도안을 완성하던 나날에 있었던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국기의 흰 동그라미안에 보습을 그려넣으려다가 실패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이번에는 그 보습을 다시 국장에 넣으려고 책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왕궁인 경복궁을 그려넣으려고 발악하였다.
이러한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국장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리 나라의 자립적민족공업과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전력은 동력으로 된다.공업도 농업도 전력이 없이는 발전할수 없다.그렇기때문에 발전소를 넣는것이 적당할것같다.발전소로 하면 색조도 아름답게 될것이다.
김주경동지의 가슴은 대번에 후련해졌다.
이렇게 되여 우리의 국장은 훌륭히 완성되게 되였다.
우리의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새겨주는 이야기였다.
더없이 신성하고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의 국기와 국장!
뇌이면뇌일수록 이 나라의 공민된 긍지와 자부심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은 창전거리에는 행복의 불빛이 비껴흐르고있었다.
그 불빛은 우리의 자랑이고 미래인 국기와 국장을 언제나 심장에 안고 사는 참된 애국자가 되라고 속삭이는듯했다.
글 본사기자 김일권
사진 본사기자 김광림
중구역 대동문동 57인민반 김지량로인의 가족이 들려준 이야기
뜻깊은 공화국창건기념일을 눈앞에 둔 이 시각 우리 조국의 국기, 국장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과 존중의 감정은 더욱 승화되고있다.
며칠전 우리는 중구역 대동문동 57인민반에 살고있는 김지량로인의 집을 찾았다.그의 아버지 김주경동지가 우리 공화국의 국기, 국장도안가들중의 한사람이였다는 사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하게 했던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우리 인민의 진정한 어머니품이며 참된 삶과 행복의 요람입니다.》
우리들이 찾아온 취지를 알게 된 팔순의 김지량로인은 수십년세월 소중히 안고 사는 추억깊은 이야기를 꺼내는것이였다.
주체36(1947)년 11월중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는 사업을 발기하시고 그 제정위원회를 내오도록 하시였다.
김주경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이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국장과 국기의 도안을 작성하는 사업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리 나라 국기와 국장은 완전히 새롭고 조선적인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그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켰다.하여 그는 도안가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실천에 구현하기 위해 피타는 정열을 쏟아부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국기초안작성사업을 일정하게 추진시켰을 때였다.
국기도안가들은 국기의 흰 동그라미안에 무엇을 그려넣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바로 이러한 때 당과 국가의 요직에 잠입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흰 동그라미안에 보습을 그려넣자고, 그래야 《조선적》이라고 고집하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흰 동그라미안에는 오각별을 그려넣을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소중한 별을 국기도안에 새기는 김주경동지의 눈굽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흰 동그라미안에 오각별을 정성껏 그려넣으니 기발이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았다.
그것을 깊은 감동속에 바라보는 김주경동지의 눈앞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따라 힘차게 전진하는 조국의 모습이 어리여왔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우리들에게 공화국의 국기, 국장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로고와 심혈속에 태여난것이라고 늘 외우군 했습니다.》
로인의 맏아들 김일기동무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였다.
그러면서 그는 할아버지가 국장도안을 완성하던 나날에 있었던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국기의 흰 동그라미안에 보습을 그려넣으려다가 실패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이번에는 그 보습을 다시 국장에 넣으려고 책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왕궁인 경복궁을 그려넣으려고 발악하였다.
이러한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국장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리 나라의 자립적민족공업과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전력은 동력으로 된다.공업도 농업도 전력이 없이는 발전할수 없다.그렇기때문에 발전소를 넣는것이 적당할것같다.발전소로 하면 색조도 아름답게 될것이다.
김주경동지의 가슴은 대번에 후련해졌다.
이렇게 되여 우리의 국장은 훌륭히 완성되게 되였다.
우리의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새겨주는 이야기였다.
더없이 신성하고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의 국기와 국장!
뇌이면뇌일수록 이 나라의 공민된 긍지와 자부심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은 창전거리에는 행복의 불빛이 비껴흐르고있었다.
그 불빛은 우리의 자랑이고 미래인 국기와 국장을 언제나 심장에 안고 사는 참된 애국자가 되라고 속삭이는듯했다.
글 본사기자 김일권
사진 본사기자 김광림
#韩语[超话]##韩语翻译[超话]##韩语摘抄#
독서 스크랩
tvN STORY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35회
韩语版《老人与海》
『노인과 바다』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美]欧内斯特·海明威)
역자: 김욱동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一个人并不是生来要给打败的。你尽可以消灭他,可就是打不败他。
날마다 새로운데, 운이 따른다면 더 좋기는 하지. 그래도 나는 신중을 기하겠어. 운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每一天都是一个新的日子。走运当然是好的,不过我情愿做到分毫不差。这样,运气来的时候,你就有所准备了。
싸움닭처럼 한쪽 눈이나 심지어 양쪽 눈이 다 빠지면서까지 계속 싸우지는 못할 거야. 이런 대단한 새나 짐승과 비교해 보면 인간이란 그리 대단한 게 못 돼. 난 차라리 저 캄캄한 바다 속에 사는 저런 놈이 되고 싶구나.
也不能像斗鸡那样,被啄瞎了一只或者两只眼睛还能战斗下去。和那些英勇无畏的鸟兽相比,人算不得什么。可我还是情愿做那个待在黑暗的深水里的家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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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STORY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35회
韩语版《老人与海》
『노인과 바다』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美]欧内斯特·海明威)
역자: 김욱동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一个人并不是生来要给打败的。你尽可以消灭他,可就是打不败他。
날마다 새로운데, 운이 따른다면 더 좋기는 하지. 그래도 나는 신중을 기하겠어. 운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每一天都是一个新的日子。走运当然是好的,不过我情愿做到分毫不差。这样,运气来的时候,你就有所准备了。
싸움닭처럼 한쪽 눈이나 심지어 양쪽 눈이 다 빠지면서까지 계속 싸우지는 못할 거야. 이런 대단한 새나 짐승과 비교해 보면 인간이란 그리 대단한 게 못 돼. 난 차라리 저 캄캄한 바다 속에 사는 저런 놈이 되고 싶구나.
也不能像斗鸡那样,被啄瞎了一只或者两只眼睛还能战斗下去。和那些英勇无畏的鸟兽相比,人算不得什么。可我还是情愿做那个待在黑暗的深水里的家伙。
오늘은 《9.3》-자치주성립경축의 노래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그때는 자치구라 불렀음, 1955년 4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성립과 함께 창작되여 인차 널리 보급되면서 불러진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연변의 조선족군중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치권리를 부여받은 기쁨과 격정을 흥겹고 즐거운 노래가락에 담아낸 불후의 명곡이며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만백성의 사랑을 받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가 창작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력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1952년 여름, 당시 연변지위 선전부장이였던 최채동지의 지시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성립경축일에 부를 노래를 창작하기 위한 좌담모임이 연길에서 소집되였다. 이날 좌담회에 참가한 연길시문예사업일군들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성립과 함께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하에 조선족들이 자기 언어문자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데로부터 국가의 주인으로 되였고 자유롭게 자기 언어문자로 창작하고 자치권리를 향수할 수 있게 되였다는 데서 크게 고무 받았으며 드높은 창작열의와 적극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좌담회후 문예사업일군들은 분분히 필을 들고 경축대회에서 부를 노래를 창작하였는데 창작된 허다한 노래들속에서 차창준 작사, 김성민 작곡으로 된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가 단연 농후한 민족분위기와 명절분위기를 노래에 남김없이 담아내여 경축활동의 노래로 선정되였다.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만장단절주에 정방형결구로 구성되였다. 이 가요는 뒤부분을 후렴으로 만들었기에 복잡하지 않고 통속적이며 음역도 11도밖에 안되므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있다.또한 음조에서는 조선족민속악의 특징적인 평조와 그의 파생인 상평조의 음조진행을 많이 사용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자치주로 개명됨) 성립의 경사스런 날 오후 3시, 연길인민광장으로 흰옷을 입은 3만명 인파가 환락의 물결을 이루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기쁨과 환희가 차넘치는 드넓은 광장에서는 남녀로소 할것없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목청을 다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바로 부르고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우리의 노래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였다.
그후부터《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연변뿐만아니라 중국에 사는 모든 조선족인민들이 사랑하는 노래가 되였고 1950년대 초반 자치주성립의 그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부르고 내일에도 부를 명실공히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우리 민족의 명곡으로 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그때는 자치구라 불렀음, 1955년 4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성립과 함께 창작되여 인차 널리 보급되면서 불러진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연변의 조선족군중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치권리를 부여받은 기쁨과 격정을 흥겹고 즐거운 노래가락에 담아낸 불후의 명곡이며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만백성의 사랑을 받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가 창작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력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1952년 여름, 당시 연변지위 선전부장이였던 최채동지의 지시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성립경축일에 부를 노래를 창작하기 위한 좌담모임이 연길에서 소집되였다. 이날 좌담회에 참가한 연길시문예사업일군들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성립과 함께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하에 조선족들이 자기 언어문자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데로부터 국가의 주인으로 되였고 자유롭게 자기 언어문자로 창작하고 자치권리를 향수할 수 있게 되였다는 데서 크게 고무 받았으며 드높은 창작열의와 적극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좌담회후 문예사업일군들은 분분히 필을 들고 경축대회에서 부를 노래를 창작하였는데 창작된 허다한 노래들속에서 차창준 작사, 김성민 작곡으로 된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가 단연 농후한 민족분위기와 명절분위기를 노래에 남김없이 담아내여 경축활동의 노래로 선정되였다.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만장단절주에 정방형결구로 구성되였다. 이 가요는 뒤부분을 후렴으로 만들었기에 복잡하지 않고 통속적이며 음역도 11도밖에 안되므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있다.또한 음조에서는 조선족민속악의 특징적인 평조와 그의 파생인 상평조의 음조진행을 많이 사용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자치주로 개명됨) 성립의 경사스런 날 오후 3시, 연길인민광장으로 흰옷을 입은 3만명 인파가 환락의 물결을 이루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기쁨과 환희가 차넘치는 드넓은 광장에서는 남녀로소 할것없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목청을 다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바로 부르고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우리의 노래 《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였다.
그후부터《자치주성립 경축의 노래》는 연변뿐만아니라 중국에 사는 모든 조선족인민들이 사랑하는 노래가 되였고 1950년대 초반 자치주성립의 그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부르고 내일에도 부를 명실공히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우리 민족의 명곡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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